세계의 작곡가

낭만주의 시대의 로맨티스트 –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낭만주의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불리는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슈만은 1810년 6월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Zwickau) 출생입니다. 아버지인 프리드리히(Friedrich)는 문학을 전공한 학자로 서적 출판업과 번역가 일을 했는데요, 슈만은 이런 아버지의 재능을 받았는지 일찌감치 문학적 소양을 보입니다. 14살에 아버지가 출판하는 책에 원고를 실을 정도였으니까요. 음악적 재능도 있어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까지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슈만을 베버에게 보내려합니다. 하지만 1826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결국 슈만은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음악인으로서의 열정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의 공연을 보게 된 슈만. 파가니니의 연주에 충격을 받은 슈만은 라이프치히에 온지 불과 며칠만에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의 문하로 들어가 피아노를 배웁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생각에 손가락에 모래주머니까지 달고 맹훈련을 하지만 결국 왼손 약지가 부러지며 피아노를 접게됩니다.

 

결국 슈만은 연주자의 꿈을 접고 음악평론과 작곡의 길을 선택합니다. 1830년에는 첫 작품인 ‘아베크 변주곡’을 발표하고, 1831년엔 하인리히 도른(Heinrich Dorn)에게 작곡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 시절 슈만은 비크의 제자인 에르네스티 폰 프리켄(Ernestine von Fricken)과 사랑에 빠졌는데요, 그녀를 위해 피아노곡인 ‘카니발’과 ‘교향적 변주곡’을 작곡하죠. 1834년엔 새롭게 창간된 ‘신음악지’의 편집장을 맡게 됩니다.

 

이 즈음 에르네스티와 헤어진 슈만의 눈에 다른 여자가 들어옵니다. 바로 비크의 딸인 클라라였습니다. 겨우 14살인 클라라에게 청혼까지 하게 되죠. 하지만 비크는 둘의 만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클라라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신동 피아니스트였고, 당시 슈만은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비크가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로 고소하자, 슈만도 이에 맞서 법정 다툼을 벌입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던 스승과 제자의 법정 싸움은, 1840년 슈만이 승소하며 마무리됩니다.

 

9살의 나이 차이였지만, 둘의 금실은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결혼 후 심리적인 안정을 찾은 슈만은 ‘시인의 사랑’, ‘리더 크라이스’, ‘여자의 생애’ 등 걸작 가곡을 잇따라 발표하죠. 아이도 무려 6명이나 낳습니다. 슈만은 클라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항상 옆에 그녀가 있길 바랍니다. 그런 슈만 예술가적 삶을 상당 부분 희생해야 했던 클라라. 하지만 헌신적 부인이었던 클라라는 묵묵히 남편을 지원합니다.

 

슈만은 1841년 교향곡 1번을 완성하고, 4번의 초고도 마무리합니다. 교향곡 1번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는데요, 초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1844년엔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이주했으나 이 즈음부터 그에겐 점차 정신이상 징후가 나타납니다. 1850년엔 뒤셀도르프에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지만 그의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작곡가로서의 그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슈만은 3년만인 1953년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사임 직전이었던 1853년 9월, 슈만은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나게 됩니다. 브람스의 재능에 감복한 슈만은 그와 많은 것을 공유하며 음악적 멘토를 자처하죠. 하지만 당시 슈만의 건강은 이미 악화될 대로 악회된 상태였습니다. 브람스를 만난지 반년도 못돼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한 슈만, 이후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1856년 숨을 거둡니다. 사인은 폐렴이었습니다.

 

슈만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재능을 결합해 구현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엔 감수성 짙은 시의 느낌마저 듭니다. 하지만 그런 두 재능은 충돌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슈만 스스로 두 재능에 플로레스탄(Florestan), 오이제비우스(Eusebius)라는 이름을 붙이며 가공의 인물처럼 대했죠. 이런 모습은 훗날의 정신병과도 연결됩니다.

 

슈만에겐 당대의 음악가들과는 다른 독창적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참신한 화성에, 특히 리듬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리듬에 대한 감각은 낭만주의 작곡가 중 최고라고 평가받죠. 부점음표나 당김음을 자주 사용하며 둥둥 떠다니는 느낌의 리듬을 주로 사용했죠. 슈만에게 큰 영향을 준 건 베토벤입니다. 그의 시적 표현들은 슈베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바흐의 작품을 연구해 그의 대위법을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슈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와의 관계입니다. 슈만이 죽기 전 클라라에게 “나도 알아”라고 말을 했는데요, 혹자는 이 말이 브람스와 클라라의 불륜을 안다는 소리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슈만 사후에도 죽을 때까지 독신을 고수하고, 브람스 또한 클라라와 그의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돌봅니다. 이렇게 선을 지키면서도 우정으로 함께했던 셋의 이야기는, 음악사의 로맨틱한 명장면 중 하나로 길이길이 남게 됩니다. 이상 세계의 작곡가 ‘슈만’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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