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작곡가

수많은 대음악가들의 은사 – 안토니오 살리에리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살리에리하면 어떤 게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모차르트와의 일화일겁니다. 살리에리는 대중에게 모차르트를 독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왜 이런 스토리가 만들어졌는지 살리에리의 일대기를 돌아봐야겠습니다.

 

살리에리는 175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노 출생입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를 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Gasmann)이 눈여겨봅니다. 살리에리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것이죠. 가스만의 덕으로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로 건너갑니다.

 

살리에리의 인생은 음악가로서 거칠 줄 모르고 정상으로 달려갔습니다. 1774년 빈에서 요제프 황제를 알게 돼 궁정 오페라 감독에 임명되고, 1788년에는 황실의 에배와 음악교육을 책임지는 카펠마이스터, 즉 궁정악장까지 오릅니다. 음악가로선 오스트리아 최고의 직위였죠.

 

살리에리의 작품은 오페라에 주로 쏠려 있습니다. 그루크와의 공동작품인 오페라 <다나이드 Les Danaides>가 1784년 파리에서 상연돼 성공했고, 또 1786년 파리 초연 오페라 <오라스 les Horaces> 역시 흥행했습니다. 오페라 뿐 아니라 발레음악, 교회음악, 오라토리오까지 만들며 음악적 재능을 맘껏 뽐냈습니다. 살리에리는 34년 간 35편의 오페라를 써 대부분을 흥행시켰습니다. 가히 흥행 마스터라 할 수 있죠. 그의 인기는 19세기 들어 시들었는데요, 마지막 20여 년 동안 신작을 거의 내지 않은 것도 원인이지만, 대중들이 바로크 시대의 고전적 스타일을 이어받은 살리에리의 작품을 한물갔다 여긴 것도 이유였습니다.

 

그가 가장 높게 평가받는 건 음악 교육자로서의 역할입니다. 대표적 케이스는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본에서 빈으로 이주한 뒤 여러 음악 선생을 찾아다녔지만 딱히 만족할 가르침을 받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바쁜 모차르트는 겨우 4개월 정도만 그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베토벤에게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법과, 하이든이 미처 다 알려주지 못한 대위법을 가르쳤습니다.

 

슈베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리에리는 1804년 당시 7살 밖에 안된 슈베르트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 4년 뒤 빈의 음악원인 콘빅트 입학을 주선합니다. 콘빅트 졸업 후에도 슈베르트에게 섬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피아노의 귀재 프란츠 리스트, 베토벤의 제자 카를 체르니도 지도했습니다.

 

모차르트 독살설을 들여봐야겠는데요, 살리에리가 일반인들 사이에 살인자 취급을 받은 건 영화 <아마데우스> 탓이 큽니다.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흥행을 했기에, 극중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죠. 하지만 조금만 찾아봐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인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둘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초반엔 도리어 모차르트 쪽이 질투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781년 모차르트가 스물네살의 나이로 빈에 진출했을 때, 살리에리의 위치는 확고했습니다. 당시 모차르트가 그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황제의 눈에 든 인물은 오직 살리에리 하나’라고 말했을 정도죠.

 

하지만 이후 기록을 보면 둘의 관계는 무척이나 좋습니다. 카펠마이스터에 임명된 직후 살리에리는 자신의 오페라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쓴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1790년 레오폴트 2세의 대관 즈음엔 모차르트의 미사곡을 직접 지휘했죠. 또 둘은 공동으로 칸타타 ‘오펠리아의 회복’을 작곡했습니다. 당시 모차르트의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에 대한 그의 호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원인 모를 질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35살이라는 이른 나이였죠. 모차르트는 죽기 직전, 급작스레 상태가 악화돼자 ‘누가 나한테 독을 먹였는가’라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그의 말이 와전돼 살리에리에게까지 피해가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암살설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죠. 살리에리는 1823년 치매로 인해 요양소 신세를 져야했는데요, 거기서 혼잣말로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되뇌이곤 했습니다. 희곡과 영화의 내용은 이런데서 기인한 겁니다.

 

살리에리는 음악성은 물론 인품까지 뛰어났습니다. 자신의 고아였던 시절을 돌이키며 대부분의 제자를 무료로 가르쳤죠. 모차르트가 죽은 뒤 그의 부인인 콘스탄체가 아들 프란츠를 살리에리에게 보낸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격자이자 교육자, 또 뛰어난 음악가였던 살리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암살설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 덕에 재조명됐습니다. 악당으로의 잘못된 정보가 부각됐지만 묻혀 있던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영화 개봉 후 살리에리의 앨범이 잇달아 발매됐습니다. 음악인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지만, 후세의 이런 평가를 살리에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척 궁금하네요. 이상 세계의 작곡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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