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작곡가

악극의 거장 –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작곡가는 악극의 거장이자 독일의 자랑인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입니다.

바그너는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형과 누나가 모두 극단에서 일해 자연스레 바그너도 학창시절부터 극작에 빠져들죠. 초기엔 셰익스피어같은 대문호가 꿈이었고 음악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며 음악에 눈을 뜹니다. 특히 15살 때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크게 감동하며 음악에 열중하게 됩니다.

바그너는 1831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음악과 철학을 배웁니다.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인 테오도어 바인니히(Thedor Weinig)를 사사하죠.

바그너는 1833년부터 작곡가로 공식 데뷔합니다. 지휘자 겸 악장의 역할로 독일 각지를 도는 투어 여행을 갖죠. 가극 대본도 쓰고 작곡도 하지만 그다지 좋은 성과를 얻진 못합니다. 그러다 여배우인 미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을 합니다.

20대의 바그너는 그리 넉넉지 못했습니다. 26살 땐 빚으로 인해 파리로 도피를 가야했죠. 파리 시절은 바그너가 문학적/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던 좋은 시기였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음악인과 문학가, 예술가를 만나며 소양을 쌓을 수 있었죠. 특히 프란츠 리스트와의 만남은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1842년엔 드레스덴에서 ‘리엔치’가 상연됩니다. 이를 계기로 바그너는 드레스덴 궁정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됩니다. 1943년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드레스덴 초연을 합니다. 바그너는 1848년 일어난 드레스덴 혁명에 참여하는데요, 이에 체포령이 내려지자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의 집에 몸을 숨깁니다. 포위망이 좁혀오자 다시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합니다.

이후 바그너는 1858년까지 취리히를 중심으로 각지를 여행하며 작곡, 지휘, 평론활동을 합니다. 창작열이 가장 불타올랐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요, 저서인 ‘미래의 예술 작품’, ‘오페라와 드라마’가 이때 출판됐습니다. 또 그의 대표적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 작곡도 가속화되죠. 그의 명성도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지만 가극 상연으로 인한 빚과 화려한 생활로 항상 쪼들리는 삶을 삽니다.

바그너의 말년엔 바이에른 국왕인 루트비히 2세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생깁니다. 그의 좋은 대우 아래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죠. 1866년 아내 민나를 잃지만, 70년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재혼합니다. 1868년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사실 바그너는 작곡가, 극작가이기 이전에 연출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가극장 문화에 항상 목마름이 있었고, 결국 자신의 공연을 위한 최적의 장소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이죠. 공연장은 프리드리히 2세 등의 도움으로 1876년 어렵게 완공됩니다. 거의 30년이 걸려 완성된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이 이때 초연되죠.

바그너는 1882년 최후의 악극이 된 ‘파르지팔’을 완성, 초연합니다. 그해 베네치아로 요양을 떠났으나 이듬해인 1883년, 심장마비로 70년 인생을 마감합니다.

바그너는 낭만주의로 출발했으나 새로운 화성과 작곡법을 창안, 근대 음악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습니다. 또 엣 가극의 전통해서 탈피해 음악, 연극, 문학을 아우르는 악극을 창시했죠. 바그너의 악극은 모두 바그너가 쓰고 작곡하고 무대장치와 조명까지 생각하며 만든 것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엔 관악기가 특히 도드라집니다.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음향이 특징이죠. 목관악기 또한 3~4관 가까이 편성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그너가 정작 연주에는 익숙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런 부분은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왔습니다. 피아노에 익숙한 작곡가는 피아노에 중점을 두기 마련이고, 또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은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작곡을 하기 때문이죠. 악기 연주에 자신 없던 바그너는 그렇게 선입견 없게 작곡했고 자신만의 독특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 바그너는 어떤 조합이 훌륭한 사운드를 만들 수 있는지 잘 이해고 있었고, 악기별 조합과 구성에 대해서도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심연을 재현해 내야한다’고 설명합니다.

바그너는 음악가는 물론 음악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독일음악론’, ‘미래의 예술작품’ 등 많은 음악론을 집필했고, 그가 추구한 무한 선율과 화성 표현의 철저한 추구, 대규모 관현악법 등은 후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히틀러가 사랑한 작곡가라는 점, 많은 ‘안티’를 양산했다는 점이 논란거리로 떠오르지만, 음악적인 면에서만 볼 땐 너무나 배울 게 많은 거장 중 거장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작곡가 바그너 편이었습니다.

 

※ 바그너의 로엔그린 바로보기 클릭 (로열 콘체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바로보기 클릭!!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바그너의 리치엔 서곡 (항저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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