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작곡가

음악계의 앙팡 테리블 –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Sergey Sergeyevich Prokofiev)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1891년 러시아 손초프카(Sontsovka)에서 태어났습니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하며 일찌감치 재능을 보입니다.

프로코피예프는 13살이던 19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합니다. 뛰어난 재능과 연주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무례하고도 도발적인 언행에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적지 않게 당황하죠. 음악원에서도 꾸준히 작곡을 하는데요, 역시나 파격적이고 진보적이었던 그의 작품은 음악원 내에서 큰 논란거리로 떠오릅니다. 그는 1914년 음악원을 우등으로 졸업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등의 성공으로 주목받는 신진 작곡가 반열에 오른 프로코피예프.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바람이 몰아닥치며 그의 활동에도 제약이 걸리죠. 18세기 풍의 밝고 건강한 ‘고전적 교향곡’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지만, 혁명이 오래될 거란 생각에 망명을 택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시베리아와 일본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 끝에 미국에 도착합니다. 그는 미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피아노 협주곡 3번’, 오페라 ‘세 개 오렌지의 사랑’ 등을 발표하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 파리로 이주합니다. ‘강철의 춤’, ‘피아노 협주곡 4번’ 등이 이때 완성되죠. 1927년엔 러시아로 투어를 떠나는데요, 서구와 다른 좋은 평가에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36년 러시아로 완전히 귀국합니다.

귀국 후엔 자신의 모더니즘 기법을 평이한 형식에 결합시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곡을 만들었습니다. ‘키제 중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등이 그것이죠. 이와 별개로 당시 러시아의 정세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1938년엔 여권이 압수돼 평생 외국을 밟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독소전쟁까지 벌어져 동부로 피신을 하죠. 피신 후에도 창작활동을 쉬지 않습니다. 53세이던 1944년 완성된 교향곡 5번은 그의 걸작 중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세계대전 이후로는 다시 서구적 형식주의가 강해지는데요, 이로 인해 음악가들의 비판을 받게 되고 스스로도 반성을 합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교향곡 7번 등 극히 간명하고 평범한 고전 형태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낙상사고로 인한 뇌진탕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냅니다. 또 문화예술계에 대한 스탈린의 압박도 끊이지 않죠.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52년 교향곡 7번을 초연한 후 이듬해인 53년 뇌출혈로 생을 마감합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20세기 현대음악 작곡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죠. 작품색이 계속 바뀌었지만, 결국은 차이코프스키부터 현대에 이르는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정통적으로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작곡 초기엔 ‘앙팡 테리블’이란 별명에 딱 맞게 도발적 작품을 주로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교향곡 1번에선 하이든, 모차르트 작품을 따라했고, 조용하고 담담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내는 등 양면성을 보였죠.

젊은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독특한 성격 덕에 일화가 많았습니다. 음악원 시절에도 교수들의 뒷담화로 유명했고, 졸업 후에는 선배인 스트라빈스키마저 열렬히 비판했죠. 가족관계도 평범치 않았는데요, 외국 활동 중 스페인 가수 리나 루베라(Lina Llubera)와 결혼해 아이 둘을 가졌으나 독소전쟁 중 불륜까지 일으킵니다. 범상치 않던 작곡가 프로코피예프, 모범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런 천재성과 끝없는 도전 정신은 그를 현대음악의 중심에 위치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작곡가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였습니다.

 

※ 피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 2악장 바로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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