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바로크 음악의 거장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바흐는 1685년 3월 독일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태어났습니다. 바흐 가문은 200년이나 유럽에 명성을 떨친 명문가였습니다. 성장을 위한 환경이 좋을 수밖에 없었죠.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진 바흐. 바흐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큰아버지에게 오르간을 배우며 기초를 다집니다.

 

9살 때 어머니를 여읜 바흐는, 자기보다 14살이나 많은 맏형 크리스토프(Christoph)와 지내게 됩니다. 형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운 바흐는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웁니다. 15살 때 형을 떠난 바흐는 뤼네부르크(Lüneburg)에 있는 세인트 미첼 스쿨에 입학합니다. 이 시절 바흐는 함부르크로 여행을 가 오르간 거장인 요한 아담스 라인켄(Johann Adam Reincken)을 알게 됩니다.

 

바흐는 1702년 학교를 졸업합니다. 자립을 위해 1703년부터 바이마르 궁정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죠. 같은 해 8월엔 아른슈타트(Arnstadt)에 있는 한 교회의 오르가니스로 부임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바흐는 성가대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골치덩어리로 전락하고, 자기 직업에 회의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1705년 휴가를 내고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erich Buxtehude)를 만나기 위해 400킬로나 떨어진 뤼베크Lübeck()에 걸어갑니다. 바흐는 그의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죠. 바흐는 한동안 그곳에서 ‘토카타와 푸가’를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는 오랜 시간의 공석, 그리고 훈련에 대한 태도 등을 지적하며 바흐를 비난합니다. 이직을 결심한 바흐. 바흐는 1707년 6월 독일 뮬하우젠(Mühlhausen)으로 떠납니다. 뮬하우젠의 환경은 아른슈타트 시절보다 열악했습니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했죠. 그곳에서 바흐는 칸타타 71번과 106번, 131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들을 작곡합니다. 10대부터 사귄 마리아 바바라(Maria Barbara)와 결혼도 합니다.

 

1708년부터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일하게 됩니다. 뮬하우젠 시절의 2배나 되는 급료였죠. 이때를 바흐의 ‘오르간곡 시대’라 부릅니다. 그의 오르간곡 대부분이 이때 작곡됐죠. 바흐의 명성은 이때 이미 독일에 자자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1714년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됩니다. 바이마르 시절은 9년간 계속됩니다. 궁정악장의 후임을 뽑는데, 바흐가 아니라 능력도 없는 악장의 아들이 발탁된 것이죠. 이에 바흐가 사임의사를 밝히고, 새로운 자리를 알아봅니다.

 

바흐의 다음 직장은 쾨텐(Köthen)의 궁정악장이었습니다. 당시 궁정악장은 음악가로서 최고의 지휘였죠. 그렇다보니 바흐의 기분도 좋았나봅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등, 그의 대표적 기악곡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집니다. 즐겁고 밝은 곡이 많았죠. 금슬도 좋아 자식도 일곱이나 두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이 계속되진 않습니다. 아내인 마리아가 숨을 거둔 것이죠. 바흐는 1721년 16살이나 어린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 윌크(Anna Magdalena Wilcke)와 재혼합니다.

 

그의 다음 정착지는 라이프치히였습니다. 그의 이직엔 역시 이유가 있었는데요, 쾨텐엔 아이들을 위한 변변찮은 대학이 없었습니다. 또 쾨텐 영주가 결혼 후 음악에 대한 관심이 부쩍 준 것도 이유죠. 라이프치히의 보수도 더 좋았습니다. 바흐는 1723년 5월 라이프치히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 교회의 음악 책임자로 부임합니다.

 

라이프치히는 바흐의 마지막 직장이 됩니다. 역시나 여러 가지 불만이 있었지만 이직이 쉽지 않았습니다. 창작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만들어진 작품엔 완전 창작곡보다는 편집 버전이 많았습니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 골트베르크 변주곡 등이 이때 탄생했습니다. 1740년부터는 노쇠화로 인해 작곡 빈도가 현저하게 줄었고, 결국 1749년 뇌일혈로 졸도, 1950년 7월 사망합니다.

 

바흐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과 더불어 거장으로 칭송받는 인물이죠. 그 중 하나인 베토벤 또한 “바흐는 냇물이 아니다. 바다다”라며 극찬한 바 있죠.

 

하지만 바흐가 빛을 본건 그의 사후에도 훌찍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뒤쳐진 곡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죠. 정말이지 18세기 동안은 대중들 사이에서 잊혀진 존재 취급을 당했습니다. 바흐의 이름이 다시 떠오른건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포켈(johann nikolaus forkel)이 바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그래도 바흐는 비발디 등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에 비하면 일직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바흐는 다음 세대인 고전파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등등, 당시 작곡가 중엔 바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죠. 대중 사이엔 잊혀졌지만, 음악가들만은 바흐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바흐는 음과 음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과 조화의 고조에 대한 원리, 즉 화성악과 대위법에 완성시켰습니다. 마태수난곡을 독일어로 작곡해 시민들에게 감동과 이해를 준 것 또한 그의 업적입니다.

 

워낙 시대가 오래되다 보니 바흐 작품엔 분실곡이 많습니다. 불완전한 복원도 많죠. 갑자기 바흐의 악보가 발견됐다는 기사도 종종 등장합니다. 바흐 음악의 발굴 작업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워낙 재능도 출중하고 작품도 많이 만들다보니 바흐의 작품 발굴은 흡사 보물찾기로까지 비유됩니다. 이렇게 보물같은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낸 바로크 음악의 거장. 바흐야 말로 음악사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긴 보물 그 자체가 아닐까요. 지금까지 세계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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