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작곡가

체코 음악의 세계화 – 안토닌 드보르작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체코의 대표 작곡가인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드보르작은 1841년 체코 프라하 근교의 넬라호제베스 출생입니다. 아버지는 여인숙 겸 정육점을 경영했지만, 음악적 지식도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드보르작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당초 가게를 이어받게 하기 위해 교사인 안톤 리만(Anton Liehmann)에게 독일어를 배우게 했으나, 리만은 동시에 유능한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드보르작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로의 꿈을 만개하기 위해 1857년 친척의 원조를 받아 프라하로 떠납니다.

드보르작은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서 음악에 대한 기초를 배웁니다. 당시부터 바그너를 좋아해, 바그너의 멜로디나 화성상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소화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작곡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시절 드보르작은 바그너와 동시에 베토벤도 연구하며 실내악과 교향곡 연습을 계속합니다.

드보르작은 1862년 새롭게 발족된 오페라 극장의 비올라 주자로 발탁됩니다. 1866년엔 해당 극장의 음악 감독에까지 오릅니다. 이 즈음 그는 대선배인 스메타나로부터 작품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보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스메타나의 민족 오페라를 연주하며 창작 의욕이 고취됐고 오페라 작곡에 심취합니다. 하지만 오페라는 그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된 오페라에 대한 도전은 큰 성과를 낳지 못합니다.

그가 점차 이름은 알린 건 1871년입니다. ‘찬가’가 대성공을 거둬 독자적 어법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죠. 동시에 사모하던 가수 안나 체르마코바(Anna Čermáková)와 결혼까지 합니다. 또 비올라 주자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이직, 보수까지 오르며 많은 창작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는 1875년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 자금 시험에 통과, 유럽 악단에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당시 잘나가던 브람스와의 유대관계는 이때 시작됩니다.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소개로 브람스와의 교우가 시작되죠. 브람스는 이미 드보르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안 한슬리크가 연결 고리 역할을 한 것이죠. 드보르작은 브람스의 도움을 받아 이때부터 체코 이외의 다른 나라 활동도 시작합니다.

1878년 출판된 ‘제 1집’ 덕으로 그의 명성이 세계로 뻗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호평을 받았죠. 하지만 동시에 장녀를 포함, 그의 세 아이가 잇따라 죽습니다. 이 당시의 침통함에 완성된 곡이 바로 ‘스타바트 마테르’였습니다. 이 시기엔 다수의 걸작이 나왔는데요, 1889년 완성된 교향곡 8번, 그리고 피아노 3중주곡인 ‘둠키’입니다.

1892년 드보르작은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 내셔널 음악원의 초청을 받은 것이죠. 처음엔 향수병 등을 걱정하며 제안을 고사합니다. 하지만 미국 측의 잇따른 구애와, 또 많은 연봉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대서양을 건넙니다.

당시만 해도 인종 차별이 극에 달했는데요, 드보르작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흑인이나 미국 인디언들까지 학생으로 받습니다. 자연스레 흑인, 인디언들과의 교우가 시작됐고, 다양한 문화가 반영된 9번 교향곡 ‘신세계로부터’가 탄생합니다. 신세계로부터는 미국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도 담겨있는 곡입니다. 이후의 미국 생활에서 스메타나는 현악 4중주곡인 ‘아메리카’, ‘첼로 협주곡 b단조’ 등을 발표합니다.

1895년 귀국한 드보르작은 다시 프라하 음악원의 교편을 잡습니다. 이 당시엔 교향시 중심의 작품을 만들었는데요,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알미다’까지 실패하고 맙니다. 당시 몸상태가 좋지 않던 그는 결국 뇌줄중으로 쓰러지고, 1904년 5월 1일 자신의 저택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 민족주의 음악의 대표 주자로 꼽힙니다. 하지만 둘의 경향은 약간 다른데요, 스메타나가 교향시와 오페라에 민족주의를 반영한 반면, 드보르작은 브람스 풍의 고전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체코 음악이 세계로 뻗어나간 것도 드보르작의 영향이 큽니다. 특히 미국 생활 덕에 그의 이름이 더 크게 뻗어나갔죠. 흑인과 인디언까지 가리지 않는 ‘절충적 민족주의’는 체코 음악의 세계화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의 음악에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오페라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두 나쁘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그가 오페라에 바친 시간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였죠. 지금까지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을 소개해드렸습니다.

 

※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바로보기 클릭!!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드보르작의 교향곡 5번 바로보기 클릭!!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

※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 바로보기 클릭!! (덴마크 라디오 심포니)

※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바로보기 클릭!! (구띠에 카푸숑)

※ 드보르작의 론도 G단조 바로보기 클릭!! (첼리스트 세쿠 케네스-메이슨)

※ 이지수의 원포인트 엑섭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편 바로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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