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작곡가

19세기 후반 최대의 교회음악가 –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세계의 작곡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19세기 후반 최대의 교회음악가인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브루크너는 1824년 오스트리아 안스펠덴(Ansfelden)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루크너의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었는데요, 아버지가 교회와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쳐 브루크너 또한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브루크너가 음악에 전념한 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학교 선생님을 꿈꿨죠. 실제 1945년엔 학교 교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음악 또한 파고듭니다. 독학으로 피아노, 오르간, 화성학, 대위법을 연구하고 성 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며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작곡과 교원 생활을 사이에 놓고 고민이 많았는데요, 1954년 ‘미사 솔렘니스’의 성공을 계기로 음악을 택하게 됩니다.

1855년 브루크너는 린츠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됩니다. 연주 실력 또한 탁월해 성당과 세간으로부터 동시에 인정을 받죠. 또 린츠 극장의 악장인 오토 키츨러(Otto Kitzler)에게 악기론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 형식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후에 빠져들게 되는 바그너의 세계 또한 이때 접하죠.

교직을 내려놓기로 했지만 이번엔 음악을 통해 돌아옵니다. 1868년엔 빈음악원 교수가 돼 빈에 정착을 하고, 1978년엔 빈 대학 강사를 겸합니다. 이 기간 브루크너는 교향곡 2번부터 8번을 완성됩니다.

바그너에 깊이 심취한 브루크너는 1865년 바그너를 직접 만나러 갑니다. 헌정곡까지 헌사할 정도였죠. 이런 브루크너의 행동은 반 바그너 주의를 가진 ‘전통파’의 반감을 삽니다. 전통파의 방해로 브루크너의 성공 또한 계속 기로에 막히죠. 하지만 말러(Mahler), 괼레리히(Göllerich) 등의 동료들이 결속해 브루크너를 돕습니다. 결국 관현5중주곡, 제 7,8번 교향곡 등이 잇달아 성공해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브루크너는 지나친 공부와 살면서 닥친 여러 문제에 시달리며 건강이 차츰 나빠졌습니다. 결국 만년엔 병에 걸려 학교에서도 물러납니다. 이후에도 창작 활동은 계속됐지만 예전만큼 전념할 수 없었죠. 합창곡인 ‘타펠리트’, ‘헬골란트’ 정도만 탄생했습니다. 반면 브루크너는 이미 만들어진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에 힘썼습니다. 마의 영역으로 알려지는 ‘9번 교향곡; 완성에는 그 또한 실패했습니다. 브루크너가 계단 많은 고층 주택 사는 걸 걱정한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황제가 그에게 펠베데레(belvedere)궁 부속 건물을 하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황제의 배려에도 불구, 이사 1년 후인 1895년 세상을 떠납니다.

브루크너는 19세기 후반 최대 교회음악가로 평가됩니다. 또 최근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도 불리죠. 대기만성형 작곡가로 음악적 발상이 오르간적이고 또한 종교적입니다.

브루크너는 자신의 작품에 항상 비판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완성작 또한 과감하게 손을 대곤 했죠. 바그너의 영향 강하게 받아 브람스와는 대조적 작풍을 띄었습니다. 그의 미사곡엔 예사롭지 않은 현대성이 깃들어 있고, 또 교향곡엔 종교적 자연감정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브루크너가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그가 세상 뜨고 20년도 넘은 세계 1차 대전 이후였습니다. 살아생전 저평가 되던 브루크너의 곡들은 후세의 끊임없는 분석과 연구로 계속해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자 청렴하기로 유명한 작곡가였습니다. 가난에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작곡에 대한 보수도 거의 받지 않고 일생을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청렴함, 또 신앙심을 지니고 있던 안톤 브루크너. 누구나 존경할만한 순수하고 훌륭한 음악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작곡가였습니다.

 

※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연주 바로보기 클릭!!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태그

관련기사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Connect with

Back to top button
Close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