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tory

20세기를 빛낸 名지휘자들 top10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카라얀,칼 뵘, 게오르그 솔티, 클라이버, 클렘페러, 번스타인,발터, 첼리비다케,푸르트뱅글러

[Orchestrastory]

번스타인부터 카라얀까지 20세기를 빛나게 한 名지휘자들 10명을 소개합니다.

올해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탄생100주년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현재 오케스트라에 그의 작품들이 프로그래밍되면서 올 한해는 번스타인과 관련있는 연주들이 풍성할텐데요. 그를 기념하면서 그와 동시대를 주름잡았던 전설의 거장,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지휘자들을 주관적 흐름에 따라 소개합니다.

1.아르투르 토스카니니 (1867-1957)

카라얀, 번스타인, 클라이버등 많은 지휘자가 존경을 표시한 ‘지휘의 조상’, ‘지휘의 아버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첼로전공이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파르마 음악원을 우수한 연주실력으로 졸업하고,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의 극장에서 첼리스트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지휘자가 없을 때 대신 지휘봉을 잡은 것을 시작으로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휘할 때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150여 곡의 작품들을 악보 없이 지휘했다고 합니다. 푸치니와 동시대로 라 보헴의 작품 초연을 맡았고, 바그너, 베르디, 드뷔시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주목받는 음악가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라 스칼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로 일하던 그는 파시즘에 반대하며 두 번이나 사임했었습니다. 1908년 미국으로 간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1915년까지 일했습니다. 이후 뉴욕 필하모닉(1928-36)을 이끌었고, 1937년에는 미국의 NBC방송은 그를 위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그를 지휘자로 초청했습니다. NBC 심포니를 17년간 지휘한 지휘자로서 황금시대를 보냈고, 지휘자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생각들이 이후 많은 지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2.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908-1989)

이미지: 사람 1명

20세기의 지휘자에서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푸르트뱅글러와 토스카니니의 시대가 끝나자 번스타인과 함께 카라얀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고향이기도 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피아노와 지휘법, 음악학을 공부했고, 1927년에는 19살의 나이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지만 5년 만에 밀려났습니다. 그에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1933년 나치에 입당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그는 34년에는 아헨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그 다음 해에는 음악 총감독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빈 슈타츠오퍼, 베를린 필과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나치에 협력했던 그의 음악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았던 그를 EMI의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가 카라얀을 불렀습니다. 앨범 녹음을 전문으로 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카라얀이 이끌 수 있도록 했고, 그 이후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푸르트뱅글러가 사망하면서 카라얀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1955년에는 베를린 필에 들어갔고 종신 예술감독을 맡게 되면서 카라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의 앨범을 함께 작업하게 되면서 국제적으로 카라얀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카라얀을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상업화에 가장 핵심이었고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생각하기에는 그가 이끌었던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음악과, 완성도 있는 음반들로 인해 클래식 음악이 대중들에게 확대되었다는 것은 사실 때문 이기도 합니다.

3.게오르그 솔티 (1912-1997)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지휘자로서는 드물게 ‘경(Sir)’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바르톡, 바이너 도흐나니 등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는 피아노, 작곡, 지휘법 등을 공부하고 음악원을 졸업한 뒤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에서 부지휘자로 일했습니다. 그는 헝가리계 유태인이었는데 나치 정권에서 스위스로 망명하여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었습니다.

1946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프랑크푸르트 시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다른 극장의 객원 지휘자로도 일하며 지휘자로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그는 1958년부터 세계 최초로 녹음을 시작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통해서 국제적으로 스타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는 지휘자로는 드물게 ‘경(Sir)’ 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많은 명반을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과 그의 나이 75세를 기념하는 앨범인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하이든 교향곡 93번과 99번입니다.

4.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카라얀 이전 20세기를 빛낸 또 다른 지휘자, 독일 태생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작곡을 공부하였는데, 1905년부터 브레슬라우, 뮌헨 지역에서 견습 지휘자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1906년 뭔헨 카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공식적으로 지휘자로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뤼벡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면서 본격적 지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만하임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1920년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설적인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라이프히의 게반하우스의 지휘자가 됩니다. 그가 지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할 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독일을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 독일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전범 재판을 받기도 했지만, 나치 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 지휘자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여러 가지 병과 청력에 이상이 생겼지만, 그는 사망 전까지 꾸준하게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지휘자로서 악보에 쓰여 있는 것을 알맞게 해석해내는 것을 넘어서 악보 안에 담긴 내용까지 해석해야 하며, 분석과 해석보다는 영감과 직감을 중요시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왕성한 연주 활동 중에는 같은 청력 이상 이었던 베토벤의 작품에서 그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대표되는 연주곡은 1951년 합창 교향곡 모음에 있는 ‘합창’과 1953년 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실황연주입니다.

5.레너드 번스타인 (1918-1990)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레너드 번스타인, 그는 20세기 음악계의 빼놓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와 피아노,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지휘자로서 데뷔는 1941년 보스턴 팝스 오케스라를 지휘하면서 시작하여, 1943년부터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기로 예정되었던 연주를 갑작스럽게 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타로 번스타인이 그 연주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 연주가 ‘뉴욕 타임즈’ 등 많은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면서 스타 지휘자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는 지휘자뿐 아니라 작곡가, 피아니스트, 교육가로 다양한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유연하고, 정확하게 바톤 테크닉을 구사하며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번스타인은 쉰베르크 중심의 음렬주의나 조성을 거부하는 음악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조성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정신과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클래식과 재즈,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나들고, 오페라와 뮤지컬을 구분 짓지 않고 다양하게 받아드렸습니다. 또한, 텔레비전을 활용하여 음악의 상업성과 교육성을 동시에 잡으며 클래식 음악을 청소년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독일 지휘자들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번스타인은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두 차례나 녹음 하면서 말러의 부활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정열적인 지휘로 최고의 연주를 이끌어 내는 지휘자 였습니다.

6.브루노 발터(1876-1962)

발터는 지휘자로서 겸손과 존경을 담아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부드럽고 각진 곳이 없습니다. 그는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가 13세 때에는 베를린 필과 협연까지 한 수재였던 그는 한스 폰 뵐로의 연주를 보고 지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쾰른 시립가극장에서 그는 지휘자로서 데뷔를 했습니다. 그 후 함부르크 프레스부르크 등에서 지휘경험을 쌓은 후 1900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 극장 부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음해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 감독으로 있었던 빈 국립 가극장으로부터 초청받아 악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악장으로 취임 후 음악 감독이었던 말러로부터 음악적 철학과 사상등 배우고 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발터는 말러의 작품을 잘 이해하며 해석했고, 말러는 발터를 매우 아꼈습니다.

발터의 본명은 브루노 발터 슐레징거라는 유대인의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시대적 상황상 유대계 성은 그의 음악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러의 권유로 발터는 이름도 바꾸고 국적도 오스트리아로 변경했습니다. 1913년 뮌헨의 오페라 극장, 1925년에는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 1929년에는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면서 인정받는 지휘자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하지만 1933년 독일의 나치 정권아래에서 유태인이었던 그의 활동을 금지시켜서 그는 프랑스로 국적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음악적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다시 1940년 미국으로 귀화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NBC 교향악단,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에 초빙되어 지휘하였고, 1956년에는 당시 개발된 스테레오 녹음에 은퇴를 선언한 그를 초빙하기 위해 특별히CBS가 조직한 콜럼비아 교향악단을 조직하여 많은 레코딩들을 남겼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레코딩은 모차르트 후기 6대 교향곡과 브람스 교향곡 전집입니다. 또한, 1952년 공연한 말러의 ‘대지의 노래’ 역시 명반으로 손꼽힙니다.

7.오토 클렘페러(1885-1973)

딱딱하고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그리고 그의 음악 역시 그의 외모와 비슷하게 고집스럽고 무뚝뚝합니다. 그는 중부 유럽의 실레지아 지방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는 독일 영토인 곳입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구스타프 말러의 추천으로 프라하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가 됐지만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인해 쫓겨났고, 그럼에도 자신을 추천해준 말러의 추천서를 평생 간직했다고 합니다.

1910년에는 다시 한번 말러의 추천으로 함부르크 오페라와 계약했으나 염문을 일으켜 또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바르멘, 쾰른, 베를린 슈타츠오퍼를 거치면서 그는 능력 있는 지휘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935년 나치 정권 시절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정통 독일 레퍼토리인 베토벤, 브람스, 말러의 작품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쇤베르크 작품을 초연하기도 하면서 현대음악도 연주했습니다. 그는 지휘자로서 잘 나가고 있었지만 1939년 뇌종양진단을 받고 부분적인 마비가 찾아 왔습니다.

지휘활동을 하지 못해 딸의 도움으로 살다가 어렵게 지휘계에 복귀했지만, 사고로 허리 골절을 입었고, 앉아서 지휘할 수밖에 없었으나 ‘돈 조반니’ 지휘 중에 기적적으로 일어섰습니다. 몇 년 후에는 파이프를 물고 잠을 자다가 전신에 화상을 입었고, 몇 해 뒤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음악계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연주와 녹음을 병행하며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말년에는 모든 곡의 템포가 느려지기는 했지만 그의 음악에는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많은 완성도 있는 작품 중에 바흐의 미사 B 단조, 브루크너, 말러의 교향곡등이 대표작입니다.

8.칼 뵘(1885-1973)

사실 카라얀과 자주 비교의 상대로 올랐던 사람은 번스타인이 아니라 칼 뵘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고향이 같았고,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빈 필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카라얀의 음악적 독재 시대에 유일하게 대적할 만한 상대는 칼 뵘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군인이었던 숙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사고를 당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오페라 공연을 위해 피아노를 치며 가수들을 연습하는 코레페티토어로 일했습니다. 1917년에는 네슬러의 오페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1931년에는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어 많은 오페라 작품들을 연주했습니다. 이후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최고 해석가가 되었습니다.

1943년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 감독이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주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아서 물러났습니다. 1956년에는 재건된 빈 슈타츠오퍼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지만, 여러 가지 음모로 인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에는 다시 빈 필하모닉의 명예 지휘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카라얀과 같은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레코딩에 욕심이 없었기도 했고, 카라얀의 견제로 많은 레코딩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도 남겨진 알반 베르크의 룰루와 보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비롯한 오페라 전집등이 있습니다.

9.카를로스 클라이버 (1930-2004)

클라이버는 자신이 직접 고쳐 쓴 악보를 보며 지휘했던 지휘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리허설 때 본인이 직접 고쳐 쓰고 빽빽하게 지시사항이 적혀있는 악보를 나눠주고 그것으로 연습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꼼꼼하고 치밀합니다.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작품은 연주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니 그가 얼마나 음악을 신중하고 치밀하게 해석하여 연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클라이버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당시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음악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1935년 나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음악 감독 자리에서 내려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습니다. 클라이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공학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와 견습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956년에는 라인 도이치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64년에는 취리히 오페라 극장, 66년 뷔르템베르크 오페라 극장, 68년에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등 유럽음악의 중심에서 영향력 있는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70년대에는 빈 슈타츠오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코벤트가든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했습니다. 그는 레코딩에는 욕심이 없어서 많은 앨범이 있지는 않으나, 남아있는것은 모두 성공작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를 비롯하여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4번, 빈 필하모닉과 함께한 5번과 7번, 브람스 교향곡 4번은 교향곡 레코딩 중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0.세르주 첼리비다케(1912-1996)

첼리비다케가 실력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레코딩을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고집불통이며, 독재자, 레코딩은 통조림 음식에 불과하다며 레코딩을 멀리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의 그는 여러 방면에서 천재적이었습니다. 철학과 수학을 전공했고, 그가 음악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이유는 부카레스트에 있는 무용 교습소의 피아노 반주자로 취직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서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파리에서 공부하다 후에 베를린으로 건너가 철학과 수학을 계속 공부하면서, 작곡과 지휘 공부도 같이 하며 지휘 테크닉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습니다.

그는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처음 지휘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베를린에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직에서 내려오면서, 후임자였던 레오 보르카르트가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취임하자마자 레오 보르카르트는 군인의 실수로 발사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났고, 임시적으로 첼리바다케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잡은 그는 1952년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할 때 까지 베를린 필을 이끌었습니다.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여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공석이 되자 단원들은 첼리비다케 대신 카라얀을 지명했습니다. 그것으로 첼리비다케는 충격을 받고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남미 등을 떠돌며 방황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1961년에 스웨덴 라디오 방송국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75년에는 슈투르가르트 라디오 방송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서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79년에는 뮌헨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 직을 맡았던 루돌프 켐페가 사망하면서 첼리비다케가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좋은 연주가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단원들을 연습시켰습니다. 단원들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지쳤지만 뮌헨 필하모닉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습니다. 생전에 레코딩을 멀리했던 그는 많은 레코딩을 남기진 않았지만 브루크너의 교향곡 전집은 많이 추천되고 있습니다. 보통 65분 내외의 연주시간인 곡이지만 그의 극도로 느림 템포의 해석으로 첼리비다케는 80분에 걸쳐 연주됩니다.

 

 

오케스트라 스토리 이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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